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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노은동 사회교리학교 2강 사회교리의 원리(2023.4.21.)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4. 22.

김용태 마태오 신부의 '사회교리의 원리' 강의 

노은동 사회교리학교 2강. 4월 21일(금) 저녁 7시 40분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두번째 강의가 2023년 4월 21일(금) 저녁 7시 40분 성당 지하 다목적실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강의 제목은 <사회교리의 원리>로 첫 번째 ‘인권’ 강의를 맡았던 김용태 신부가 맡아서 진행했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사회교리의 원리

4월 14일(금) 저녁 7시 40분~9시37분 , 김용태 마태오 신부

사회교리의 원리의 바탕은 인간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이 없다면 사회교리의 원리도 무의미해집니다. 인간이 파리목숨이라면, 인간이 존엄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인간이 동물보다 나아서 원숭이보다 나아서 돌고래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서 존엄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하라”는 말씀처럼 모든 피조물을 다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감수성을 온전히 알아들은 분이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었어요. 이 분은 이 세상의 해와 달, 새와 동물과 자연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내 주위의 피조물, 자연들을 함부로 여기고 훼손시킨다면, 그런 세상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함부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자신의 존엄성을 비교와 차별에서 찾기 때문에, 나보다 못한 존재들을 함부로 여기고, 그들보다 똑똑하고 재능있고 지위가 높기에 존엄하다는 식의 논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보다 더 많은 걸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면 내 존엄성은 사라지기 때문이죠. 진정한 존엄성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고, 이 존엄성을 인정할 때 아 것도 가지지 못한 이들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섬기고 또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초적 권리는 생명권

그리고 모든 권리 중의 권리, 원초적 권리는 바로 생명권입니다. 이걸 최고의 기본으로 하지요. 일단 살려놓고 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않고, 일단 죽게 생겼으면 빨리 건져놓고 봐야 한다는 것, 이게 모든 것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것을 따져야 합니다. 낙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여성의 권리도 중요하고 대단하지만, 그 대단함이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최고로 우선하는 권리가 바로 생명권입니다. 일단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산 다음에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삶이 비참하고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서 결국 다리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을 본다면 무조건 살려놓고 봐야 합니다. 생명권을 가장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권리 중 최고의 기본권은 바로 생명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회교리의 바탕이 되는 인간의 존엄성은 사실상 인간만 국한된 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다 포함합니다. 앞으로 사회교리 학교에서 ‘생태’에 대해 이야기하며 더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강의 제목은 사회교리의 원리입니다

사회교리라고 해서 사회교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빛, 가르침을 가지고 안방, 건너방, 성당만을 비추었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비추었습니다. 이것이 대체로 우리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루 24시간을 대부분 사회, 세상에서 생활하는 데 말입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창궐하니까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당에 오지 말라고 한 것은 역사적으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박해 시대에도 목숨을 걸고 미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공동체의 미사,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미사가 처음으로 중단되었습니다.

교회에 오지 말라고 했던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자 어떤 신자분이 말씀하시길, “할 게 없다”라고 합니다. 이게 잘못되었던 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동안 성당 안에서만 이뤄졌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온 세상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일터, 직장, 사람들을 만나는 모든 장소와 시간이 신앙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당 울타리에 한정되어 있었고, 복음의 빛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곳도 성당과 가정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성당과 집만을 비추던 그 교리로 세상을 비추는 게 사회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이 시대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럼 과연 ‘이 시대 마구간과 십자가는 어디인가?’ ‘수도 없는 십자가들, 의인들의 죽음을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법정에서 아무런 죄없이 죽임을 당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어떻게 잊지 않고 지낼 것인가?’ 과연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말하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커튼 닫고 음악 들으며 차를 마시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는데,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죠.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마전장이도 하얗게 할 수 없다는 걸, 그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하얗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빛나는 예수님 모습을 본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왜 내려가셨나? 

“내려가지 말고 여기 그냥 살죠. 너무 황홀하고 좋으니까요”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산꼭대기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삶의 현장, 십자가가 있는 곳에서 벌어집니다. 날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날 미워하는 사람도 있는 바로 그곳으로 예수님이 다시 돌아가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신앙생활의 장소를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눈여겨볼 것은 모세, 엘리야, 영광스러운 모습들이 다 사라지지만, 예수님만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수많은 오해와 갈등 속에서 영광을 찾을 수가 없지만, 성당 안에서의 영광과 감격을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지만, 이런 곳이 세상이지만, 모세도 사라지고 엘리야도 사라지지만, 예수님만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거 하나 붙잡고 갑니다. 수난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을 이뤄내는 곳은 바로 산꼭대기가 아니라 산 아래, 삶의 현장입니다.

우리들은 성당의 전례를 통한, 전례 안에서의 예수님, 감실 안의 예수님만을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고통 속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세상 속에, 말구유 속에, 십자가에 박힌 예수님이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모든 교리는 다 사회교리입니다. 무인도에서도 어떤 인간이 하는 행동이라도 그것 역시 사회적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교리 중에 그걸 요약한 것, 엑기스를 뽑아낸 것이 바로 <사회교리의 원리>입니다. 원리를 알면 나머지는 다 적응시키는 겁니다. 세상의 온갖 정책들, 그것이 과연 복음적인가? TV에서 말하는 정치와 경제 사회의 수많은 것들에 ‘사회교리의 원리’를 적용시키면 알 수 있습니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만 알면 숫자의 계산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교리의 원리

 

세상의 온갖 일들이 사회교리의 원리에 맞으면 복음적입니다. 그 중 3가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은 모든 것의 바탕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데서 오는 존엄성, 거기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모든 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게 복음입니다. 두꺼운 성경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지으시고 기르시고 살리신다.”입니다. 너무 기나요? 줄이면 “잘 살아보세”입니다.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이 추려놓은 게 복음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잘 살아보세”이고요. 이것도 길다고 더 줄이면 “참삶”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내용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내용입니다.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셨기에 잘 살아야 하는데, 그 관계성을 깨고 죄로 인해 우리 삶이 온전하지 못하고 찌그러지고 왜곡되었을 때, 이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성가정의 삶을 살라고 초대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복음인데, 그래서 우리를 살리신다는 것, 잘 살게 해주신다는 것, 그 복음의 바탕이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이 바탕으로 3개의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공동선의 원리
두 번째 보조성의 원리
세 번째 연대성의 원리

이 세 가지 원리의 바탕은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인간은 존엄하므로 이를 완성되도록 하는 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기 위한 수많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 엑기스를 요약하면 사회에 적용시킬 때 3가지 원리로 도출합니다. 먹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누구나 “경제가 중요하다”라고 말하죠. 우리 삶을 이루는 수많은 원리 중에서 경제에 적용하는 게 “재화의 보편목적의 원칙”입니다.  그리고 보조성의 원리가 있고, 여기서 연결되는 또 하나는 “참여”입니다. 사회교리의 원리는 3개의 원리(공동선, 보조성, 연대성) 그리고 두 개의 원칙(재화의 보편목적의 원칙, 참여의 원칙)이 있습니다.

 

공동선의 원리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공동선에 입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공동선을 가장 잘 설명하는 건 이겁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이게 바로 공동선의 원리입니다. 자기들끼리만 이로운 게 아니라, 누구 하나만 이로운 게 아니라, 한 명도 제외 없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 공동선의 원리입니다.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도 같은 이치입니다. 세계적인 K-문화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세상을 주도할 가치가 우리 안에 있는 겁니다. ‘홍익인간’이란 것 역시 대단한 겁니다. 고조선 건국 이념이 바로 공동선의 원리였던 겁니다. 그리고 “너희와 많은 이들을 위해 흘릴 피다.” 이전 번역은 “너희와 모든 이들을 위하여”였어요. 모두를 위한 것, 모두를 위해 좋은 것, 정책이 부자들을 위한 게 아니라, 소수만을 위한 게 아니라 모두를 위해야 합니다. 어떤 정책을 내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 좋은 것인가? 이런 걸 봐야 합니다.

공동선의 원리에는 시급함의 순서가 있다
공동선의 원리가 추구하는 데에는 시급함의 순서가 있습니다. 당장 도와주지 않으면 죽게 될 사람들을 우선 도와야 합니다. 공동선의 원리는 기계적 평등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걸 다 이롭게 한다는 것은 똑같이 100만 원씩 준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1천만 원이 필요하지만, 또 어떤 이는 100만 원도 필요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것은 기계적 균등함이 아닙니다. 공동선이 지향하는 것은 모두가 함께 하자는 겁니다.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 
공동선의 개념과 원리 안에는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포함된 겁니다. 개개인의 선을 합친 게 공동선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살도록 그 선함이 한데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바다가 평평한 것은 그 바닥의 계곡 깊은 밑바닥부터 물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본래 이기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공동선의 원리를 이루기 위해서, 모두를 이롭게 한다고 할 때,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고 했을 때, 개인들의 정당한 권리가 충돌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선순위를 그럼 누가 정해야 할까요? 이걸 정하라고 정치공동체가 있는 겁니다. 공권력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서로의 이해가 충돌할 때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시급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정해주는 것이 바로 공권력이 할 일입니다.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가난한 이를 위해 정책을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부자들을 더 배 불리는 일을 한다면, 그런 사람을 뽑아야 할까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가난한 사람들이 뽑는 경우가 있습니다. 노동자가 재벌을 위한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상황을 목격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지하고 몰라서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도 자칭 ‘보수세력’이 있습니다. 왜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요? 나쁜 놈이거나 무지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인은 나쁜 놈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식한 겁니다. 무지하거나 무식하기 때문에, 그런 식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공동체와 공권력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을 때, 공동선의 원리에 입각해서 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동선의 원리가 추구하는 것은 ‘모두의 완성’입니다. 신앙에서는 ‘구원’이라고 하죠. 공동선의 모든 장치들, 법과 제도들은 자기 완성을 위해 작동합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느님처럼 되는 겁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기 위함입니다. 인간 사회가 하느님 나라처럼 되는 것, 이것이 공동선의 원리가 추구하는 겁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하느님 닮은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라고 하지요. 이걸 일컬어 신화(神化, deification)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걸 “인간 주제에 어떻게 하느님처럼 되냐?”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부러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데이피까시온’이란 말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신화(神化, deification)’라는 말을 안쓰고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는 말로 바뀌었어요. 오해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아무튼 이것은 인간의 완성을 말합니다. 공동선의 원리가 추구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법과 제도들이 과연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인가?’ 이를 유심히 봐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지를 봐야 합니다.

 

 

공동선의 원리에 따른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칙'

 

두 번째 공동선의 원리를 경제에 적용하는 게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칙’입니다. 재물이라고도 하는 재화는 이 세상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게 바탕입니다. 하느님 것을 우리에게 공짜로 준 것이므로, “이건 내 거다”라고 주머니에 넣어놓고, 나만을 위해서 쓰면 안 되고, 모두를 위해 쓰여져야 합니다. 즉 ‘보편적 목적’이란 ‘공동선’을 말하죠. 내가 가진 재화는 모두를 이롭게 하는 데 쓰여야 하는데, 원래 이것은 내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목헌장 69항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목헌장] 69.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8) 다양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민족들의 합법적인 제도에 적용된 소유권의 형태가 어떠하든, 언제나 재화의 이 보편적 목적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하 생략)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 모든 것들을 어느 특정한 사람 아니라 모든 사람들 다 사용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사람, 어느 단체에 속한 그들을 위해서만 사용되면 안되고, 모든 이가 두루두루 골고루 누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한쪽은 산과 언덕이 쌓여있다면 그것을 깍아서 골짜기를 메워줘야 한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는 게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재화의 보편 목적의 바탕이 되는 내용이지요.

예수께서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안에는 모든 것들의 주인이 하느님임이 드러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의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거저 주셨으므로, 우리도 서로 함께 거저주고 나눠야하는 겁니다.

사유재산권과 재화의 보편목적의 관계 
사유재산권이란 게 있습니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칙과 모순되는 걸까요? 교회는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나요? 아닙니다. 인정합니다. 다만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유재산권보다 우선되는 게 보편적 목적입니다. 그리고 사유재산권은 관리의 책임을 의미하고, 관리의 의미는 공동선을 위한 겁니다. 즉 재화의 보편목적원리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재화의 보편목적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은 필요합니다.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똑같이 공동 사용한다는 게 아니고, 주위 가난한 사람 있으면 사랑이란 가치 안에서 그리로 흘러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유재산권이 존중되는 이유는 그 책임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걸 잘 관리해서, 나 혼자 마음껏 쓰라는 게 아니라 공동선의 원리에 맞게 쓰여지도록 하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모두를 위한 것이지만, “내 것도 아니네”라는 식은 아닙니다. 부자의 부유함 자체 문제가 아니라, 흘러가지 않고, 고이고 쌓인 채로 있는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항상 공동선과 재화보편 목적의 원리에서는 누가 우선적 고려대상인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내가 가진 것은 사실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내가 뭘 주는 게 대단한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들 것을 주는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이 나를 통해서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요한 금구 성인)는 나폴리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 재물은 우리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즉 궁극적으로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관리하라고 주신 겁니다. 우리의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돌볼 때,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겁니다. 바티칸공의회 문헌 평신도교령 8항에 보면, ‘정의에 따라 이미 주었어야 할 것을 마치 사랑의 선물처럼 베풀어서는 안 된다.’라고 합니다. 이미 줬어야 하는데, 주면서 잘난 체 하는 게 아니란 거죠. 이게 바로 재화보편목적의 원리입니다. 이 또한 사유재산과 재화의 보편목적의 원칙에서 사람들은 사유재산을 더 우선하겠죠. 그런데 공동선의 원리에 따라 규제가 필요한데 이때 또 필요한 게 공권력 즉 정치공동체입니다.

8시 30분 휴식, 8시 40분 재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면,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에게 알려드리고 여러분을 초대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이란 메시지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아이가 준 것이지만, 사실 하느님이 주신 거죠. 그래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겁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이 거저 주셨으므로, 제발 여러분도 거저 주십시오. 이 초대에 응해서, 모두가 먹고 뭐가 남았어요? 음식쓰레기가 남았나요? 아니죠. 열두 광주리의 양식이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모두가 먹고도 남을 양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지를 않고 곳간에 쌓아놓아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골짜기를 평지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골짜기를 더 파면서 양극화가 됩니다. 연간 15조 원의 돈이 음식쓰레기로 인 낭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처리비용까지 하면 20조원 이상의 돈이 낭비되고 있다는 겁니다.

(전 세계 음식물 중 3분의 1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으며, 음식물 쓰레기의 증가는 기후변화를 악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 품전 세계적으로 약 4,000억달러(약 439조원)의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고 있으며,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부유한 나라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만 해도 세계 기아 인구 8억 7,000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편집자 주)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이백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옆 사람은 먹이라는 것이지, 오천 명을 먹이라는 게 아니다. 나 같은 사람 천 명이면 오천 명을 먹이는 것. 내가 열 명을 먹일 수 있으면 오백명만 있으면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것을 다 나누어주어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받아먹어라. 그렇게 다 주십니다. 오천명의 기적을 행할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런데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저희 돈이 없어요.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모자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결식아동이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죄악 
황당한 건 우리 나라에 결식아동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겁니다. 어마어마한 죄악입니다. 음식쓰레기로 20조원 이상이 낭비되는데, 밥 굶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나눠주지 않아서죠. 내돈내산이라면서 자기를 위해서는 써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 시절에 제자들 말을 듣고 그냥 가버렸다면, 쫄쫄 굶는 사람도 있었지만, 막 먹고 남아서 버리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눠주자는 호소를 했고 이에 응답하여 공동선이 이뤄진 겁니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칙으로 이루는 것, 예수님의 오천명의 기적은 우리에게 호소하는 겁니다. 이 시대 우리가 공동선의 원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합니다. 풍요는 이미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제자들은 더 많은 돈을 얘기합니다. 제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이 있어도 모자르겠다는 것은 지금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은 세가지 유혹 중에서 "돌을 빵으로 만들어 봐라."는 것이 제자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도망가죠. 예수님이 악마를 물리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풍요는 더 많은 빵에서 오는 게 아니라,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돈을 골짜기로 흘러내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풍요의 원리는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을 유혹이란 걸 압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끌리고, 빨리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풍요는 더 많은 돈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에서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개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니 이거 가지고 뭐합니까? 이천만원이 있어도 모자를텐데, 다 해산시키죠라고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너희들거 나눠줘라. 그럴 때 아이가 가지고 온 걸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기적이 이뤄집니다. 이것이 우리도 이 시대에 해야 할 숙제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 내가 어떻게 저 사람들 먹여요? 내가 혼자 해봐야 어떻게 해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라도. 그렇게 한 사람부터 시작하고, 그렇게 모이고 모여서 오천 명이 되는 겁니다. 촛불을 하나 태운다고 됩니까? 네. 작은 것에서 시작하는 것, 우리 시대에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작은 정성, 나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 하나라도. 그래서 오천명을 먹인 기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순서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 먼저이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에 입각에서 나눔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 순서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 먼저입니다. 즉 가난한 사람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공동선의 원리에,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칙에 담겨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의 의미입니다.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째, 불우이웃 돕기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는데 이건 정말 간과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불우하게 만들지 않는 겁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까지는 잘 알죠. 이웃에게 빵을 나눠주는 것까지는 잘 합니다. 그런데 이웃을 불우하게 만드는 모든 잘못된 제도들을 없애는 것에는 신경도 안 쓰고 관심도 없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가난한 이를위해 형제적 사랑으로 나누는 것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렇게 만드는 제도에는 소홀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이나면, 사회적 정치적 차원입니다. 사회구조, 정치구조, 이 안에서 더 가난하게 만들고, 더 부자로 만드는 구조를 없애는 것도 가난한 이를 위한 노력이 됩니다. 이 부분 열심 노력하는 이들을 좌파와 빨갱이로 비난합니다.

왜 가난한가?

왜 가난한가? 가난하게 만드는 것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공동선을 위해,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를 위해 나눔을 실현하고, 이웃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웃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없애는 게 중요합니다. 이웃이 울고 있을 때, 달래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웃을 때린 사람들이 더 때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래주는 게 전부인 줄 압니다. 그리고 때리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임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 주는 게 전부인 줄 알지, 정당한 빵을 빼앗아가는 이들을 말리는 이들, 이런 일들을 하려고 하면, 신부와 성직자들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방송, 언론들이 있습니다.

브라질의 유명한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성인'이라고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사회교리는 사회주의적 이념이 아니라, 애덕의 실천이다
이게 교회를 둘러싼 많은 구성원들의 잘못된 시각입니다. 사회교리를 사회주의적 이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중요한 애덕의 실천을 잃고 삽니다. 빵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빵을 뺏기지 않도록 가난한 이들 편에서 싸우는 것, 이 부분을 소홀히 하는 겁니다. 우리 교회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은데, 교회 구성원들 중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 교회의 중산층, 교회를 장악하려는 태극기 부대 등이 그런 가르침을 외면합니다. 마귀들이 복음을 들으면 소리를 치듯이, 사회 정의를 말하면 소리를 칩니다. 상처입은 이에게 약발라주는 것 중요하죠. 그런데 그 사람이 허구헌 날 두들겨 맞고 피를 철철 흘립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가 “얼마든지 얻어터져, 마음껏 얻어터져. 약은 많아. 다 발라줄게.” 이게 맞나요? 때리는 사람에게 때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너 왜 때려?” 해야 합니다. 그 매맞는 사람 편에서 이야기해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사랑에는 2가지가 있다
사랑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사회복지 그리고 사회정의의 측면이 있습니다. 사회복지국 신부님은 어디든 가는데 마다 칭찬받아요. 그런데 제가 가면, “빨갱이 새끼”라고 합니다. 저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복지도 중요하지만, 사회복음화(사회정의)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 측면. 가난한 사람을 위한 애덕의 실천에서 공동선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2가지가 있습니다. 사회복지와 사회정의가 그것입니다.

 

 

보조성의 원리


두 번째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예비’ 또는 ‘보조’를 뜻하는 라틴어 ‘섭시디움(subsidium)에서 유래합니다. subsidium은 로마 시대의 군사 용어인데요. 전방에서 싸우는 부대를 지원하는 후방 예비부대를 말합니다. 이들은 전방의 전투 부대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도 하지만, 전투에 불리해지면 나서서 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투가 유리해지면 다시 다른 부대를 도울 준비를 합니다. 즉 보조성의 원리는 말 그대로 도와주는 겁니다. 왜 도와주냐면, 혼자 하기에 뭔가 모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도와줍니다. 온전히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그게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도와주는 이유는 함께 살려는 것, 즉 공동선을 위해서,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 보조성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예수님도 딱 태어나셨을 때 동물들의 도움까지 받으셨어요. 그래서 천사들도 와서 챙겨주고, 가난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셨어요. 하느님이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무기력합니다. 슈퍼맨으로 오신 게 아니라, 어리고 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감춰진 사랑이라는 본성을 깨우쳐 주십니다. “나 도와줘”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바람 앞의 작은 촛불처럼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을 촉구합니다. 그 ‘바람 앞의 촛불’을 꺼뜨리지 말고 함께 살아가도록 촉구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돕는 것 그것이 바로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온전히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부모가 자식 키우는 것도 돕는 것인데, 그게 꼭두각시 되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어렸을 때 입에 먹을 걸 넣어주지만, 성장하면서 이제 혼자 먹을 수 있도록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방식이 바로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주도해서 “너희는 아무 것도 신경쓰지 마, 다 해줄게”그런 정책은 안 되는 겁니다. 올바른 것은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국민이 주인되도록 보조하는 게 국가입니다. 주는 것만 먹고 살라는 식으로, 독재국가 전체주의 국가처럼, 국민들이 온전히 주인처럼 생각하고 사고하는 게 없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국민들을 어린아이처럼 만드는 거 맞지 않습니다. 또한 정반대로 “세상은 정글이야. 아무것도 관리하지 않겠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모든 걸 민영화시키는 것이 그런 사례입니다. 경제는 “승리하는 사람이 쟁취하는 것, 국가는 개입하지마”라는 식의 무한경쟁. 힘세고 잘난 사람들이 승자독식하는 세상. 똑똑하지도 능력도 없는 이들이 도태되는 것, 그걸 발전이라고 보는 것.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힘의 논리입니다. 이건 아기를 정글에 던져 넣는 것이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을 정글처럼 알아서 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 걸 민영화시키려는 것도 다 보조성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정부의 중앙집권화도 안되지만, 모든 걸 시장원리도 경쟁에 맞기고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아직 뭔가 미비할 때 도와주는 게 보조성의 원리이고, 이 원리는 공동선의 원리를 지향합니다.

 

보조성의 원리와 한 세트 '참여의 원칙'

 

참여의 중요성

그래서 보조성의 원리와 세트로 나오는 게 참여의 원칙입니다. 참여는 주체적인 겁니다. 만일 어른들이 이야기할 때 꼬맹이가 뭔가 말할 때, “어디서 어른들 이야기하는데”라고 한다면 참여를 못하는 겁니다. 참여를 못한다는 것은 주체가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국민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선거 때면 참여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법과 제도들에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여를 통해 우리가 주체임이 확인되는 겁니다. 결국 보조성의 원리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어떤 제도와 법들이 우리를 참여 못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독재국가입니다. 우리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검찰 독재시대이죠. 나쁜 놈 만들고 싶으면 나쁜놈을 만들어버립니다. 2023년 이 시대에 예수님이 대한민국에 오신다면 감빵에 가실 겁니다. 신문에 대서특필될 겁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식으로 떠들겁니다. 예수님을 수구언론들이 ‘개쓰레기’를 만들 겁니다. 그러면 천주교 신자들 다 떨어져나가고, 몇 명 안 남을 수도 있겠지요.

파렴치범으로 매도당한 예수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주위의 제자들은 다 떠나가고 홀로 그렇게 죽었습니다. 파렴치범으로 매도되었습니다. 아무도 보호해주는 변호인단 없이 일방적 재판으로 증거는 조작되고, 선동가들로 인해 예수님은 나쁜 사람이 되고, 이 시대에도 그런 식으로 한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우리가 참여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그걸 보조해주는 것인데, 어느 부분에서도 참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시대는 독재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사회는 그런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법치국가라는 건 법조인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데 ‘법조인치국가’가 되었습니다. 법에 의해 국민이 다스리고 참여하는 나라인데, 지금은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검찰개혁, 사법개혁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참여민주주의입니다. 참여가 이뤄져야 민주주의이지, 참여가 이뤄지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사회교리 189조

사회교리 189조를 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참여를 장려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은밀한 특권의 고착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정치 지도자들의 교체도 이따금 필요하다.”

가톨릭 교리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잘못하면 교체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빨리 교체해야 합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그래서 참여라고 하는 것은 어른이 하는 거고 주인이 하는 겁니다. 아이나 종들이 하는 게 아니지요. 즉 참여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기에 할 수 있는 겁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그런데 내가 참여할 수 없다면 잘못된 겁니다. 즉 올바른 참여를 가로막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저항해야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군부독재는 그 폭력성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엄청 교묘해진 독재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즉, 자본독재가 한 예이지요. 돈으로 독재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돈 없으면 가”입니다.  그리고 검찰독재, 언론독재. 이들이 국민의 눈과 귀를 다 막아버립니다. 참여를 방해하는 형태들, 이것들을 국민이 주인이 되도록 고쳐나가야 합니다. 참여민주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2023년 대한민국은 독재국가와 다름이 없습니다. 독재국가 안에서 저항은 어렵습니다. 독재자들은 참여를 자기들에 대한 반대, 저항으로 보겠죠. 그들의 기본적 인식이 그래서 가능한 한 모든 부분에서 참여가 이뤄질 수 없도록 발악을 합니다. 그래야 일방적 폭력성이 이뤄지니까. 우리는 이걸 온 몸으로 거부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연대성의 원리

 

바오로 사도의 유기체 교회론 
세 번째는 연대성의 원리입니다.  연대성(Solidarity)은 "결합하다"입니다. 아주 굳게 결합하는 겁니다. 설렁설렁이 아니라 아주 굳게 결합되는 겁니다. 연대를 잘 설명하는 게 바오로 사도의 교회론인데요. 연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유기체 교회론은 코린토 1서 12장 12절부터 31절까지입니다.

 

하나인 몸과 여러 지체(코린토 1서 12,12~31)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19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20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 22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24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이하 생략)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바로 이것입니다.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모든 지체는 다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루죠. 유기체적 교회론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우리 지체는 다 하나의 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대입니다. 그냥 합쳐진 게 아니라 너 없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 필요합니다. 하나도 소용없는 존재가 없어요. 큰 보신각 종이 다 굳게 연결되어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금이 저기 구석 어딘가 있다면 그 소리는 어제와 다릅니다. 구석진 곳만 소리가 다른 게 아니라 종은 전체가 다르게 울립니다. 위를 때려도 아래를 때려도 전체가 울립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금이 구석에 가 있어도 소리가 다르듯,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면 안됩니다. 그런 식으로 노동자를 소홀히 여기면 안됩니다. “너 없으면 안돼” 상대에 대한 의존성. 바로 이것이 연대성의 기본 원리입니다. 

코로나가 주는 교훈 
코로나가 주는 교훈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 안에 잊었던 선교의 교훈을 일깨웠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았던 선교의 정신, 신앙생활을 하는 영역은 세상이고, 여러분이 사세직, 왕직, 예언직을 받았는데요. 여러분은 세상 안에서 사제입니다. 본당에서 전례를 통한 미사는 직무사제직을 가진 제가 드리고, 여러분은 참여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드리는 미사는 여러분이 하는 겁니다. 미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미사와 두번째 미사가 있습니다. 첫 번째 미사는 성당에서 전례를 통해 직무사제가 봉헌하는 미사입니다. 여러분은 참여하죠. 전례를 통해서 성당에서 직무사제가 주례를 하고 여러분은 참여하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미사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드리는 미사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여러분 스스로가 빵과 포도주가 되어 가난한 이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받아 먹어라, 받아 마셔라." 예수님께서 전례를 통해 우리에게 하신 일이시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리에서 양식이 되고 음료가 되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봉헌하는 두번째 미사입니다. 두번째 미사의 주체는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의 직장, 학교, 가정 등 발딛고 있는 모든 곳에서 여러분이 사제이며 예언자이며 사목자로 두 번째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미사는 두 번째 미사를 통해 완성되는 겁니다. 이걸 코로나가 일깨워줬습니다. "본당에 나올 일이 없으니 할 게 없어"라고요. 아닙니다. 할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코로나가 준 두번째 교훈, 생태감수성
또 하나 코로나가 일깨워준 게 있습니다. 하나는 생태감수성입니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두달 정도 지나니까 하늘이 맑은 겁니다. 제가 하늘을 바라보고 "기분 탓인가" 그랬는데, 그날 9시 뉴스에 진짜 대기권이 달라진 걸 인공위성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두 달동안 사람이 아무 것도 안하니 지구가 살아난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생태감수성이 살아났죠. 과연 진짜 바이러스는 누구인가? 인간이 바이러스이고 코로나가 지구에게 백신은 아닐까? 우리는 코로나때문에 '죽겠다 죽겠다'했지만, 사실 지구는 인간 때문에 '죽겠다 죽겠다'한 건 아닐까요. 

코로나가 주는 세번째 교훈, 보편적 감수성  
그리고 세 번째는 보편적 감수성입니다. 
2003년에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조선 여형사 다모(茶母)]라는 게 있었는데요. 하지원과 이서진이 주인공으로 나온 드라마  <다모>에는 이서진의 유명한 대사가 있죠.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게 코로나때문에 진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네가 아파도 나는 안 아프니까 상관 없어, 너는 불행해도 나는 불행하지 않으니까 상관없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이렇게 각자도생의 삶이었는데, 그런데 코로나가 이걸 바꾼 겁니다. 뭐냐면, "아프면 안돼. 너가 아프면 너 때문에 나도 아프다."라는 겁니다. 강력한 전염성 때문에, 우린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연대성의 원리에 들어있는 겁니다. 우리 몸 하나하나 다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모두 다 연결되어 있다
우리 주위의 그 누구도 없어도 되는 인간은 하나도 없어요. 그게 연대성의 원리, 즉 함께 사는 것. 거대한 몸. 우주라는 거대한 몸뚱아리. 하느님의 피조물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 이것이 바로 연대성의 원리입니다. 여기는 항상 ‘너 없으면 안된다’라는 의존성이 있습니다. “네까짓것 없어도 돼”가 아닙니다.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하나하나 다양하지만, 그게 어우러져 하나로 이루는 것처럼,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한 퍼즐의 조각들을 합친 세상입니다. 퍼즐 조각 하나는 비어있는 오목한 곳도 있고 볼록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 남은 걸 내어주고 부족한 걸 채워주는 퍼즐의 완성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남는 것도 없고 모자라는 것 없는 것이 바로 풍요입니다.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이고 이게 바로 연대입니다. 함께 사는 것, 연대성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가막힌게 이걸 태극기에 넣어놨습니다. 태극이 그런 원리입니다. 남는 걸 내어주고 부족한 걸 채워주는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이 초대하신 삶의 원리입니다. 

연대성의 궁극 
연대성의 궁극은 무엇일까요? 퍼즐의 완성인 하느님의 모습, 즉 삼위일체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완전히 하나되는 것, 즉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가 본받는 연대성 원리의 궁극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공동체로 만들어 서로 사랑하라고 만드셨습니다. 나 혼자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한 분이시면서 또 공동체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온전히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완전한 연대를 이룹니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태극기에도 표현되어 있어요. 삼태극이 그것이고, 그것이 우리 삶에서, 모든 피조물에서 구현되고 이게 구원의 궁극적 모습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는 사위일체로 성부성자성령 그리고 피조물까지 연결되는 게 연대성의 궁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오셨습니까? 

 

필리피서 2장 5절부터 8절 
필리피서 2장 5절부터 8절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이 먼저 내려오셨어요. 우리와 연대하려고. 하느님이 먼저, 그래서 우리 서로서로 연대하는 겁니다. 다 함께 어우러집니다. 연대성의 원리는 이게 하느님이 모습이 들어있기에, 서로 어우러져 사는 것은 곧 우리 안에 하느님 닮은 모습을 구현해 나가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힘

 

사회교리의 원리를 실현시키는 유일한 힘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에너지, 절대 가치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힘.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에너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가르침이 현실이 되도록 하느님이 중요한 에너지로 강조한 게 사랑이라는 힘입니다. 사랑 안에서 가능합니다. 공동선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재화보편목적의 원칙, 참여의 원칙, 그리고 연대성의 원리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힘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 사랑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보편적인 사랑이죠. 좁아터진 사랑이 아니라 넓은 사랑입니다. 공동선의 원리, 재화보편목적의 원칙, 보조성의 원리, 참여의 원칙,  연대성의 원리를 여러분이 가장 잘 실천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미 잘 실천하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부모자식 간에, 형제 자매들 간에 잘 합니다. 그것도 잘 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잘 실천하는 장소가 가정인데, 이 가정을 벗어나는 순간 그렇게 비정하고 잔인해집니다. 내 가정에 끔찍한데, 다른 가정에는 더 끔찍합니다. 

마더란 영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 살리려고 남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실제로도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에게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주면서도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삼성반도체의 20대 젊은 노동자들의 죽음에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습니다. 그런 피눈물을 통해서 이뤄진 부를 자기 자식에게 편법으로 승계합니다. 이런 게 사랑일까요?  예수님은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마음에 드는 사람, 그딴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들은 그러면 안된다. 너희들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바로 그게 보편적 사랑입니다. 그 보편적 사랑 안에서 사회교리의 원리가 완성되는 겁니다. 

사랑의 힘 안에서 현실이 될 수 있다

공동선의 원리, 재화보편목적의 원칙, 보조성의 원리, 참여의 원칙,  연대성의 원리. 이것은 모두 사랑 안에서 가능합니다. 사랑이라는 힘 안에서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한 개인이 실천하는 사랑도 있지만, 제도적 사랑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법과 제도를 복음적 구조로 만들어가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회 정치적 에너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자연인 개인으로 사랑하는 것,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는 사랑도 있지만, 이것 말고도 내가 정치인이라면 내가 만드는 정책 안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정치적 사랑입니다. 우리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방법 중에 개인적 사랑으로 빵을 하나 줄 수도 있지만, 법과 제도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빵을 줄 수 있습니다. 제도와 정책을 만드는 것이 거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정치적 참여는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는 무식한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냥 개인적으로 작은 애덕에만 멈춰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치는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가 공동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제 말이 아니고 교황님 말씀입니다. 정말 천군만마를 얻는 듯한 말씀입니다. 그 전에 저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막 "빨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황님이 이 얘기를 하시니까 더 많은 분들이 받아들이는 거 같습니다. 사회정치적 애덕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고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사제들은 독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에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하시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 왜 망했겠어요? 죄가 많아서? 맞는 말이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서울같은 큰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진짜 중요한 이유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입니다. 

 

창세기 18장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생략)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생략)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생략) ”
30 (생략)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 (생략)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 (생략)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나 하나로 인하여, 하루라도 늦게 망하게 한다면 ... 

그런데 그 넓은 도시에 의인 10명이 없었어요. 그래서 망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진작에 망했어야 할 그 이유는 어딘가에 의인이 10명이 있어서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그 역할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불타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또 역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임금님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요.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줄로 언급된 거지만, 그걸 모티브로 영화를 만든 겁니다. 반대파를 제압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정조 임금님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살수집단의 소굴을 찾아갑니다. 그들은 꼬맹이를 납치해서 어릴 적부터 살수로 키워서 궁궐로 침투시키는 것이죠. 거기서 우두머리인 광백을 만납니다. 그때 광백이 "야~ 나 하나 죽일려고 왕이 왔네 왕이~"라고 말하면서, "나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바뀔 거 같아?"라고 빈정거립니다. 세상은 안 바뀌고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다라는 그 말을 하는 순간 정조는 광백을 죽여버립니다. 그렇게 영화가 끝이 납니다. 영화의 백미인 장면입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게 바로 중용 23장입니다. 작은 것에도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하면 내안에서 배어나오고, 겉에 배어나오면 겉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정조 임금의 강력한 개혁 의지를 보이는 장면입니다. 

 

其次는 致曲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아 爲能化니라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오늘의 의인입니다. ... 

소돔과 고모라는 그 넓은 도시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계신 분들로 인해서 우리 세상이 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3년 4월 21일(금) 밤 9시37분 종료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2강 '사회교리의 원리'

김용태 마태오 신부(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