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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노은동 사회교리 9강 사회교리로 살아가기(2023.6.16.)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6. 18.

장우일 안토니오 신부의 ‘사회교리로 살아가기’ 

노은동 사회교리학교 9강. 6월 16일(금) 저녁 7시 40분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아홉 번째 강의가 2023년 6월 16일(금) 저녁 7시 40분 성당 지하 다목적실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강의 제목은 <사회교리로 살아가기>이며, 대전 전민동성당 보좌신부이며,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장우일 안토니오 신부가 맡아서, 약 2시간 동안 진행했다.  다음은 강의내용이다. 

 

마르코복음 16장 구절을 시작기도로 함

[마르코복음 16,12-1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마태 28,16-20) ;  (루카 24,36-49) ;  (요한 20,19-23) ;  (사도 1,6-8)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사회교리로 살아간다는 것은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
제가 (오늘 사회교리 9강을 시작하면서) 시작기도를 마르코복음 말미 구절로 삼은 이유는 사회교리를 살아가는 것이 곧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과 같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것도 아니라, 꼭 같습니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건 그런 겁니다. 사회교리를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 제목 《사회교리로 살아가기》의 부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인데요. 결과적으로는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같이 생각한다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는 지난 4월 14일(금)부터  매주 1회씩 달려오셨고요. 그동안 인권, 사회교리의 원리, 하느님 사랑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 정치공동체, 경제생활, 국제공동체와 평화, 환경과 생태계, 그리고 인간노동에 이르기까지 ... 어떻게 보면, 오늘 제9회차 강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정리하는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간추린 사회교리를 결론적으로 어떻게 전개해야 하나? 결국 우리는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같이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2020년 반포하신 「모든 형제들」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세 번째 회칙으로, 인간의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다루는 사회 회칙으로, 2020.10.3.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전야에 반포)

 

인간의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 
「모든 형제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최신 회칙입니다. 2020년 코로나 한창일 때 반포하셨고, 그 이전의 많은 회칙과 권고들을 심화시킨, 또 집대성한 사회교리회칙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제목이 특히 그렇습니다.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을 사회교리라고 할 때, 제목 「모든 형제들」에서부터 이를 표방합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죽 읽어보면 졸음이 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몇 주 전에 어떤 아티클이 눈에 확 들어오고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가톨릭대학교 출판부에서 매년 두 권씩 출판하는 <사목연구>라는 논문집이 있습니다. 교수신부님들이 늘 연구해서 소논문을 실어놓는 건데, 그 중 하나를 보았습니다. “모든 형제들에 나타난 사회교리 원칙들” 이걸 정리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진정이 되면서, 오늘 이 세가지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마지막 강의를 전개해나가고자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세번째 회칙  「모든 형제들」(2020)
앞서서 이 「모든 형제들」에 대해 말씀드릴 때, 교황님의 이전 회칙과 권고들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러한 것이 있다는 차원에서, 이미 아시겠지만, 소개를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문헌 기억 나시는 것, 「찬미받으소서」, 사랑의 기쁨, 복음의 기쁨(2014) 등등,   2013년 교황 취임하시고 처음 내신 회칙이 신앙의 빛(2013)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쁨은 교황권고입니다. 찬미받으소서(2015)는 두 번째 회칙입니다. 생태환경과 관련된 문헌이지요. 권고로 사랑의 기쁨(2016)이 있고, 「모든 형제들」(2020)이 세 번째 회칙 되겠습니다. 

 

사회교리와 관련된 단행본들
그리고 아울러서, 사회교리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여러 영성가들, 신부님들, 공부하신 분들이 책과 논문을 펴내고 쓰고 계십니다. 이 중 단행본 위주로 몇 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김희중 대주교님이 지으신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사회교리」(2022),  유경촌 주교님의 「우리는 주님의 생태 사도입니다(2022), 그리고 최원호 교수님의 교부들의 사회교리(2020)란 책도 관심갖고 읽어보시라고 소개해 드립니다. 이밖에도 「요한보스코 신부의 FunFun 사회교리」(2019)라는 책이 있고, 가톨릭사회교리 101문 101답」(2017),  이기우 신부님의 「세상의 빛(2016)(부제. 읽기 쉽게 다시 쓴 간추린 사회교리)라는 책, 「DOCAT(두캣) 무엇을 해야 합니까?」(2016)라는 가톨릭사회교리서, 그리고 「간추린 사회교리」(2016)와「모든 형제들」(2020)

 

이런 것들을 소개를 드립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 강의 일정의 마지막 강의를 하겠습니다. 

“과학기술문명의 급격한 발달로 사회체계가 붕괴하고, 건전한 윤리도덕과 관습이 허물어지고, 난폭한 범죄들이 증가하고, 불치의 성병이 만연되고,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실천도장이요, 안락한 보금자리인 전통적 가족제도가 무너져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고독에 시달리고 있으며,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감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다.”

 

이건 무려 42년전 앨빈토플러가 한 말입니다. (제3의 물결, 1981)  그때 당시에도 이러한 사회 모습이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요즘은 더 심해졌죠. 사회체계 많이 붕괴되고, 전쟁 일어나고, 생태의 위기에도 나몰라라 하고, 정치가 무너져서 사회질서도 자꾸만 흔들리고, 사람들 가치관도 모든 게 다 상대적이라고 얘기합니다. 양심도 상대적, 정의도 상대적,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남이 생각하는 정의가 다릅니다. 내 양심과 너의 양심이 다르니 놔두라고 합니다. 윤리와 도덕과 관습이 허물어져서 파생되는 범죄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가족이 자꾸 무너집니다. 이미 40년 전부터 가정의 해체를 말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아는 데 안하는 겁니다. 안하면 그것은 모르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몰라서, 진짜 몰라서 못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아는데 그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 안한다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회교리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개념을 잘 알고 계시겠지만, 되새기는 차원에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사회교리는 무엇인가? 누군가 형제자매님에게 “사회교리가 뭐에요?”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더불어 잘 사는 것이 사회교리이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이다.”  그렇습니다. 사회교리는 사회에 대한 가톨릭의 교리입니다. 좀더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이 겪는 좌절과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
Doctrina Socialis Catholica/Catholic Social Teaching / 제2의 교리/
사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사회교리”가 제 2의 교리라면, 제 1의 교리는 무엇?
그럼 제1의 교리는 뭔가요? 우리 구원과 맞닿아 있는 개인구원에 관련된 교리를 제 1의 교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톨릭 4대교리 아시죠?  

가톨릭 교회의 교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천주존재(天主存在), 삼위일체(三位一體), 강생구속(降生救贖), 상선벌악(賞善罰惡) 이 네 가지를 4대 교리라고 한다.

 

사회교리는 제 2의 교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1교리서의 교리와 사회교리는 별개인가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 아예 사회와 관련된 것을 끄집어 낸 것, 추출해낸 것입니다. 「간추린 사회교리」528항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28. 교회의 사회 교리는 완전히 통합된 그리스도교 교육의 필수적인 지침이다. 교도권이 사회 교리를 사도직과 사회 활동을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 제시하도록 주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훌륭한 교육 자원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특별히 사회와 정치 활동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책임을 맡고 있는 평신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사회 교리에 대한 더욱더 정확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하 생략)

 

사회교리의 정의는  ‘사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인간의 존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존엄’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피조물 전체’로 확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온 세상에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하셨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간추린 사회교리 528항에서는 “완전히 통합된 그리스도교 교육의 필수적 지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완전히 통합된’이란 교리를 집대성했다는 것
‘완전히 통합된’이란 교리를 집대성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만 알아도, 가톨릭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통합된 그리스도교 교육의 필수적 지침’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이야기, 특히 정치와 사회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얘기좀 하지 마”라고 반응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교회와 사회는 이어져 있습니다.  교회와 사회, 또 사회와 교회 앞뒤를 바꾸어 강조해봅니다. 어떤 분이 말합니다. “왜 성당에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냉담하시는 분인데, 제가 친하게 지내서 “왜 안 나오시냐”라고 물으니 이렇게 답합니다. “옛날에는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이런 생각까지 들어요.” 제 마음이 아팠고, 즉답을 피하고, “그러냐”라고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 분만이 아닐 겁니다. 지금 냉담하시는 분 중에, 또 열심인 분들 중에도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가진 분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을 계속 해보았는데요. 간단하게 제가 내린 결론은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성당에 나와야 한다.”라는 겁니다.

 

성당에 안 나오면 죽나요? 

성당에 안 나오면 죽나요? 네. 죽습니다. 영적으로 자꾸 어두워지고 무뎌짐으로 향합니다. “저는 성당 안 나가도 윤리적 도덕적 양심적으로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 수 있습니다.”라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걸 자부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울타리는 가톨릭 교회입니다. 물론 반론을 제기하실 분도 계시겠으나, 교회는 사회 안에 존재하고 사회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교회의 가르침으로 판단하고 실행할 때,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 늘 생겨나는 고통
결국 교회는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 삶에서 고통은 늘 생겨납니다. 어느 누가 “난 항상 행복합니다.”라고 할까요. 항상 고통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더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함께 하는 여러분도 계시지만, 이런 시간을 내기 어려운 형편에서 경제적 고통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을 ‘고통받는 인간’이라고 할 때,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 존재이유입니다. 

 

고통받는 인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교회의 사명
교회가 사명을 버리면 안됩니다.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교회이며, 이것은 예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한 뒤에 뭐라고 말씀하시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병자들을 치유하라”고 말씀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에 들린 이들, 병자들 모두 고통받는 이들입니다. 믿을 교리와 사회교리로 구분해놓았지만, 그것은 사실상 구분지을 수 없습니다. 믿을 교리 안에 사회교리가 있고, 사회교리는 온전히 통합된 그리스도교 교육입니다. 

 

믿을 교리와 사회교리는 별개인가? 
여기까지 공부하다가 ‘팍’하고 영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제가 보여드릴 테니까, 보시고, 이 영상과 사회교리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를 궁금하시다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2014년 tvN에서 방영된 《미생》에서 한석율 씨와 장그래 씨가 PT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거기서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https://youtu.be/Daieh1HT_pI

영상 28분 이하 내용 참고

제가 이 장면에서 확 떠오른 것은 ‘현장과 사무’는 절대 별개가 아니란 겁니다. 교회 역시 사회와 절대로 별개가 아닙니다. 교회 밖을 나가면 우리는 세상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임을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굳이 제가 끼워맞춰봤습니다. 재미있으시라고.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분이 계십니다.

“네가 오늘 읽은 신문 한 구절이 네 기도 안에 들어와 있는가?”

 

가 말씀하셨냐면요. 서봉세 신부님. 2017년 선종하신 서 신부님이 신학생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신문지상에 나오는 기사들 중에 좋은 기사들이 많이 없습니다. 있더라도 그저 좋은 걸로 넘어가고요. 비난받아 마땅한 일들, 또 그런 사람과 현상들, 또는 아픔들. 이런 것들을 보고서 그냥 비난만 하다가 끝나는가? 또 뒷담화로 끝나는가? 단순히 아파하다가 끝나는가?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제가 신학생 때 들은 게 아니라, 나중에 후배들이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하여 감동적이고,  ‘역시 뽕세 형이야’ ...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분이 또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를 했다면) 그 기도를 통해 너는 무엇을 결심했고 무엇을 할 것인가?”

 

누가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바로 접니다. 맞습니다. 기도해야죠. 기도하고 다짐하고, 복음적으로 다짐하고 또 실행해야 합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게 됩니다. 거기서 멈춥니다. 사회교리는 결국에는 실천입니다. 마태오복음에도 보면, 25,31-46 (최후의 심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복음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다. “사마리아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해라”라고 합니다.  계시의 원천인 성경에서,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질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힘없고 고통받는 이웃들,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교회의 존재의미입니다.  윤리적 타락, 폭력, 비복음적 상황이 발생하는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 개선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려 하는 게 사회교리의 목적입니다. 여러분이 뻔히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윤리적 타락과 비복음적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유에 대한 착각이라고 교황님은 「모든 형제들」에서 진단합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십니다.  진리에 대한 숙고가 없는 자유입니다. 제한 없는 권한을 스스로의 권리라 생각함으로써 스스로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무분별한 자유. 이기심이 자라고 책임감을 망각하게 합니다. 

 

https://youtube.com/shorts/vVDjRNggArI?feature=share

 

넷플릭스의 2021년 드라마 DP(디피, 군탈체포조)에서 보여주는 내무반 상황입니다. 괴롭히는 장면인데요.  군생활 형제님들이 겪으셨을 내용입니다. 계급이 높다고 동료이자 후임병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사회에 나오면 아무 것도 아닌데, 권한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권력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냥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 사회문제들에는 이기심과 탐욕이라는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게 결국은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이 마음 속에서 가라지처럼 자라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슬픈 진실입니다. 아기 때는 사랑으로 가득하던 마음 속에서 그 사랑이 쪼그라들다가, 결국 어른으로 성장해서는 돈돈돈하면서 심장에 돈이 자랍니다. 실제 상황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3Lzmz9__6E 


그리고 요새 가장 큰 문제는 마약입니다. 마약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겠죠. 그럼 중남미 뿌리를 왜 못 뽑을까요? 결탁되어 있어서겠죠. 그리고 직장 내에서 노동의 문제 많습니다. ‘청년 목숨 앗아간 아파도 출근’ 입원 필요한 20대 화장품 판매원, 휴가 요청했지만 회사서 반려. 공단 “치료 시기 놓여” 산재를 인정한 사례입니다. 

 

https://m.khan.co.kr/national/labor/article/202306052114015#c2b

 

청년 목숨 앗아간 ‘아파도 출근’

입원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아팠지만 매장 사정으로 계속 일하다 숨진 20대 화장품 판매원이 산업...

m.khan.co.kr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265545&code=61171811&sid1=all 

 

동탄 아파트 수영장 당사자 “무지했다…선처 호소” 사과

경기도 동탄의 한 아파트 공용 공간에 수영장을 설치해 공분을 산 당사자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입주민들에게 선처를 구하며 피해 상황에 대해서도 책임

news.kmib.co.kr

동탄의 한 아파트에 에어풀장을 설치해서 문제가 된 기사내용입니다. 소화전에서 물을 댕겨서 하고 있나요? 이거 철거하라고 하니, “내가 논다는데 뭐라고 해” 공분을 사니 사과는 하긴 했지만, 철거 당시, 이 물이 다 넘쳐서 민폐를 어마어마하게 끼쳤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에서 4대의 주차 자리에 차를 걸쳐서 주차하는 사진, 지하철에서 담배피는 사진,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는 내용의 사진 등, 단속을 해도 또 영업을 합니다. 원산지 속이는 건 기본이고, 다른 걸 다 속여서 팔잖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L1E4Eg9FQ_M

 

어이가 없는 논문이 있습니다.

2007년에 발표된 이 논문 제목은 「온라인 운세 콘텐츠의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런데 제목 중 ‘유지’를 ‘Yuji’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내용에서도 어색한 번역투 한글은 물론이고 표절이나 베끼기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국민대는 연구부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1055575.html

 

[사설] 교수회마저 ‘김건희 논문 검증’ 회피한 부끄러운 현실

김건희 여사의 논문 표절 의혹에 대해 국민대가 연구부정행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뒤 국민대 교수들이 재검증 필요성을 두...

www.hani.co.kr


공정과 상식의 의미를 진정 모르는 걸까요? 아닙니다. 탐욕과 집단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음 보여드리는 영상은 한문철 TV 2023년 5월 26일자 유튜브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GtEfRhywqs

 

수억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차량인 벤틀리를 타는 사람이 대리비를 안주려고 할 뿐만 아니라 막말까지 합니다. 그야말로 인격과 인성의 문제입니다. 교육 및 의료 불평등 문제도 심각합니다.  소득 5분위별 기대수명과 건강기대수명에 대한 보도를 보시겠습니다. 

 

https://www.yna.co.kr/view/GYH20200115000700044

 

[그래픽] 소득분위별 기대수명·건강수명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영은 기자 = 15일 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복지포럼에 실린 '포용복지와 건강정책의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건강불평...

www.yna.co.kr

 

1분위는 소득수준 하위 20%입니다. 5분위는 상위 20%입니다. 하위 20% 소득자들은 기대수명이 78세이고, 건강수명은 60세입니다.  5분위 사랆들은 기대수명 85세, 건강수명 72세입니다.  72대 60이면, 건강수명은 12년 차이가 납니다.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은 비례합니다.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의료수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상관관계 있습니다. 의료보험체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차이가 납니다. 제때 입원을 하는 것이겠죠. 슬픈 현실을 다른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슬픈 누적 죽으라고 한칸 올라가는 동안 저 애는 계단을 만들어놓아서 돈으로. 그냥 가면 됩니다. 

또 사회문제 중에 다국적 기업과 자본독점에 대한 문제. 신자유주의와 등등 사람이 이기심을 갖기 시작하고 탐욕이 판단을 흐리면 희안한 일이 일어납니다. 또 전쟁.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지금도 결국 1년 넘게 지속되는 우크라이나 – 러시아 전쟁은 그 슬픈 현실을 그림으로 보십시오. 군사들은 출병할 때 사령관들에게 경례를 하고 가죠. 돌아올 때는 다 병신되는데, 애네들(사령관들)은 훈장을 가득 매달고 있습니다. 무고한 이들의 희생으로 누가 이익을 보나요? 

또 생태문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2030년이 되면 지구의 온도가 1.5도 상승한다고 합니다. 지금이 15도 정도 됩니다. 150년 전만 해도 14도였던 평균 온도가 1.1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7년 뒤에 1.5도에 상승하면 지구는 더 이상 식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탄소배출을 하지 않아도 지구는 계속 뜨거워지고, 3도가 올라가면 80억명 중에 70% 이상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기후변화는 계속 현재도 일어납니다. 캐나다 불 꺼진지 모르겠습니다. 빙하는 녹고, 해수면은 올라가고, 대기오염은 나몰라라 뿜어대고, 탄소배출에 우리나라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플라스틱 쓰레기, 음식쓰레기. 정말 각성해야 합니다. 삼림의 벌목도 심각합니다. 

그 다음 이제 정말 초읽기에 들어간 이 사람들. 이거 왜 이러는건지, 방사능 ... 우리나라 정부는 왜 그러고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대전교구에서도 포스터를 현수막을 제작했습니다. 우리아이의 미래를 위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반대합니다.


교회 공식입장은 절대 반대입니다. 정부의 그럴듯한 소리 ‘맑게 해서 정화해서 내보낸다?’고 합니다. 둘러대는 이야기입니다. 저렇게 되면, 핵발전소가 여기만 있나요? 전세계 핵발전소가 저런 방식으로 내보내면 될까요? 국제사회도 문제입니다. IAEA도, 미국도 찬성했습니다. 


8시 43분 10분 휴식, 8시 52분 재개

 

‘사회교리의 기본 원칙들’ 

 

연대성 

연대성이란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 집단이 복합적인 유대 관계에 있음을 인지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공유와 참여를 통해 함께 성장하려는 정신입니다. 즉, 나는 홀로 있을 수 없다는 정신이죠. 저 사람이 존재하여 나도 있을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연대성에 반대되는 것은 바로 해체주의입니다. 해체주의는 무한한 소비와 공허한 개인주의만 남습니다. 이것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다를 게 없습니다. 또 타인을 존엄성을 지닌 인간이 아닌 그저 나와 상관없는 ‘그들’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세계공동체’입니다. 특히 「모든 형제들」은 코로나 판데믹으로 세계공동체를 절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연대성을 성장시킬 수 있는 첫째 자리는 ‘가정’이라고 말씀하시고 저들이 있어야 나도 존재할 수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보조성

보조성의 원리는 모든 상위 질서의 사회가 하위질서의 사회들에 대해 도움의 자세, 즉 보조성의 자세를 갖춰야 하며, 따라서 예속되어 있는 소규모의 사회가 증진되고 발전되도록 상회 사회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일종의 중앙집권화 혹은 관료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의 부당하고 과도한 개입을 장여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선진국들의 과학, 기술, 의학, 산업, 복지 분야의 긍정적 진보가 그렇지 못한 나라들로 전수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어선 안 됩니다. 정치는 보다 독립적으로 하위조직 혹은 구성원들을 위해 효과적인 발전과정을 이뤄나가고자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보조성의 원리를 말씀하시면서 정치의 독립을 강조하십니다.  


보스와 리더의 차이 그림(아래 링크의 기사 참조)을 보고 계십니다. 보스는 자기 혼자만 올라갑니다. 따라 올 사람은 따라와”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리더는 끝까지 책임을 져줍니다. 우리는  제 멋대로 하는 보스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리더가 필요합니다. 

 

https://globalbusiness.video.blog/2019/12/09/am-i-a-boss-or-leader/

 

Am I a Boss or Leader?

“A Boss has the title; a Leader has the people” – Simon Sinek This has been one of my favorite quotes when it comes to leadership which indicates that a leader is an influencer whereas a boss is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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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의 보편적 목적

창조된 재화가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이므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범위는 확장됩니다. 세상에서 ‘아직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태아,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장애인과 노인, 인종차별을 당하는 이들, 남성과 동일한 존엄성과 권리를 지니지 못하는 여성, 특별히 부당한 대우와 폭력의 상황으로 이중의 가난에 처해 있는 이들, ‘타인의 소유물로 전락되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취급받는 사람들’, 물질적인 편의를 누리면서도 영적인 공허함에 처해 있는 현대인들, 최신 소통 수단으로 인해 현혹되는 젊은이들. 최신소통 수단이란 특히 인터넷이나 휴대폰, 소셜미디어 등으로 인해 젊은이들은 그 안에 파묻혀지냅니다. 그런 젊은이들까지도 가난한 이들로 본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맛보지 못한 행복을 판다.
Some people Sell happiness While They Don’t Taste any of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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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덕의 실천(모든 형제들 186항)
“고통받는 사람 곁에 있어주는 것이 애덕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알지 못하여도 그러한 고통의 원인이 된 사회적 조건들을 바꾸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애덕입니다. 누군가 연로한 어르신이 강을 건너는 것을 돕는다면, 이는 탁월한 애덕의 행동입니다. 한편 정치인이 그 강에 다리를 놓습니다. 이것 또한 애덕입니다.”

 

공동선
인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공동으로 누리는 선이 각각의 개인의 선이 됩니다. 타인이 없이 개인의 선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전제합니다. 우리가 함게 살아가는 세상을 돌보는 일은 결국 나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며 그러므로 모두는 하나인 ‘우리’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떤 사회학자는 “우리나라의 환경미화원이 일순간에 싹 다 없어졌다면, 어마어마한 사회적 혼란이 생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물레이션을 돌려보니 아비규환이 된다는 겁니다. 그걸 왜 생각을 못하는가? 노동자를 대할 때, 사장은 ‘내 돈을 벌어다주는 사람들이 내 직원들인데, 월급을 따박따박 줘야지’그걸 왜 못할까요? 

인간의 공동선에 대적하는 현대의 정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신자유주의 이론’과 ‘철저한 개인주의 문화’를 이 시대의 문제로 꼽았습니다. 신자유주의를 사회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처럼 간주하는 세상에서는 ‘낙수이론’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는 소수의 단기적 이득을 겨냥하는 것이며, 더욱더 큰 개인의 욕망을 부추김과 동시에 이것이 곧 공동선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만을 줄 뿐입니다. 교황님은, 개인의 이익이 모인다 해서 온 인류 가족을 위한 나은 세상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이러한 개인주의를 ‘박멸하기 너무나 어려운 바이러스와 같다’고 천명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면 ‘편향적’이라고 하며 진영논리를 말합니다. 교황님에 대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방송시청

 

https://www.youtube.com/watch?v=dfTlMFhK5OU 

 

교회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복음은 사상이나 이념이 아닙니다. 좌파, 우파, 진보, 보수 이야기는 말장난이라고 봅니다. 그 표현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이익을 도모하려는 차원에 불과한 겁니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복음적으로 사는 겁니다. 미사를 마치고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하지, 어떤 정당을 지지하자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합시다.”를 까먹습니다.  계속해서 지지정단, 지지하는 세력 등을 따집니다. 그러나 사회교리학교를 이수했다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와 지지하는 정당을 위해 사는 게 아닙니다.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복음적으로 산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론 ...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

 

「모든 형제들」의 결론은 2가지로 나옵니다. “형제애”를 갖자입니다. 우린 모두 형제입니다. 그냥 아는 이웃이 아니라, 피를 나눈 형제이다. 이게 「모든 형제들」의 결론이고요. 두 번째는 “사회적 우애”입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저 사람도 소중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장 큰 계명,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그것은 너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웃을 잘 사랑하는 게 날 사랑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나부터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해야겠다라고 생각하니 한 단계 건너가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것이 사회교리의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이것을 생각하며 살고, 예수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 마음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 이것이 곧 사회교리라고 봅니다. 사회교리의 본질이며 정신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 물론 우리는 부족합니다. 똑같이 될 수 없겠지만, 노력합니다. 사회교리를 살아가는 것이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결론은 사회교리 살아가기는 곧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와 같은 뜻, 이퀄입니다. 

재미있는 그림 하나 발견했습니다. Equality, Equity.  똑같이 하나씩 나눠갖는게 아니라, 작은 아이는 야구를 못보잖아요. 예수님 방식으로 사는 것 그게 공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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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fferences between equality and equity poster | Zazzle | Equity vs equality, Equality and diversity, Equality diversity and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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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그림 보시면, 사랑이란 화가 났을 때도 상대를 돌보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화 났지만, 그래도 우산 씌워주고 있는 외국 그림입니다. 벤치에서 한쪽 손을 내밀어 우산을 받쳐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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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ing Even When Angry... | Funny quotes, Inspirational quotes, Love qu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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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답을 찾습니다. 고슴도치를 좋아하는 거북이는 등에 빗을 꽂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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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WILL find a way!:) | Words, Looking for love, Funny qu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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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를 공유하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결론은 이미 내렸습니다. 지금부터는 부록입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한화의 하주석 선수가 초구 스트라이크 판정에 항의를 하는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_6ddIZVe0E&t=2s 

 

신념을 가지고 선을 행하는 것이 복음화의 초석입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영상을 보겠습니다. 아마도 태국의 선량한 선행하는 젊은이 모습입니다. 화를 안내고, 리어카를 도와주고,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고, 거지아이 학교가게 돕고, 그리고 그가 받은 선물은 감동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tmSQRMtHEM  

 

선행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꾸 남들 시선 의식할 것 없이, 주님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보고 계시다고 생각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지 않고, 주님께서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신념으로 살아가고 계시리라 맏습니다.

모든 형제들 285항은 호소입니다. 그 중 맨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

하느님의 이름으로 또 이 모든 것의 이름으로, ... 대화의 문화를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로, 상호 협력을 행동 강령으로, 상호 이해를 방식과 기준으로 채택하기로 선언합니다.

 

마침기도는 야고보서 2,14-17절을 올리겠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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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6월 16일(금) 밤 9시 20분 종료
노은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9강 '사회교리로 살아가기'
장우일 안또니오 신부(대전 전민동성당 보좌,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