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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학교/사회교리 강의

사회교리 토크콘서트, 코로나가 준 교훈 (3) 선교적 감수성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3. 12. 10.

사회교리 토크콘서트 

세번째, 선교적 감수성 ... 그리스도인의 사명

김용태 마태오 신부(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의 토크콘서트

2023.12.9.(토) 오후 3시, 대전교구청 명례방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사명...  

코로나 3년이 우리에게 준 세 번째 교훈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사명, 선교적 감수성이라고 할까요? 코로나로 초유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천주교 박해 때에도 교회에 오지 말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 시절에 목숨 걸고 미사를 했습니다. 사방 1백리 안에 신부님이 왔다고 하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오지말라’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관원과 포졸이 서슬퍼렇게 막던 시절도 아닌데,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서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유튜브 찍고 평화방송으로 미사를 하기도 했어요.

 

성당살이 vs. 세상살이   

그랬더니 어떤 신자분께서 코로나로 인해 “할 게 없다”라고 합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우리 신앙이 성당 안에서만 이뤄졌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은 그동안 ‘성당살이’였습니다. 주일미사, 평일미사, 그리고 성당 안에서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살이를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들의 많은 부분이 세상살이입니다. 굉장히 집중해서 잘 해야 하는 게 세상살이입니다. 성당살이에 치중하다보니,  “할 게 없다” 라고 느끼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을 잘못했다는 걸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한 것은 성전중심주의   

예수님이 가장 싫어한 건 성전중심주의였고, 이는 곧 성직중심주의와 연결됩니다. 지난 사회교리 강의 때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이동식 성전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이란 원래 어깨에 메고 다니는 계약의 궤를 말했지요. 야훼는 ‘나는 있는자’이고, 이것은 바로  너희들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 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모든 곳에 하느님이 계셨습니다. 즉 가마처럼 어깨에 메고 다니는 이동식 성전이 있었는데, 다윗과 솔로몬이 그걸 붙박이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설계하고 솔로몬이 강행했어요.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 만이 왕이었습니다. 시나위 광야에서 40년 기간 동안, 그들이 참된 신앙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만이 왕이시다

세상의 신은 다 허깨비이고, 하느님만이 유일한 하느님이고, 우리의 왕이시구나. 이렇게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가 도출됩니다. 인간이 인간의 왕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어버이시고 우리는 종입니다. 이것을 그래서 평등공동체 200년 간의 판관기를 구현했지만, 일사분란한 명령체계가 필요하자, 전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사울을 세우고, 나깃이라고 했는데, 사울이 왕이라고 해서 쫓아내고, 다윗은 야망이 있어서 사울을 먼저 축출하고 사무엘을 축출하고 멜렉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신앙 안에서는 하느님만 왕이시니, 늘 불안합니다. 그래서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쓴 꼼수가 붙박이 성전입니다. 

 

신앙의 역사에서 큰 죄를 지은 다윗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다윗은 왕궁 옆에 붙박이 성전을 세우고, “성전을 보면 왕궁도 보겠지”라고 했겠지만, 그것은 다윗이  신앙의 역사에서 큰 죄를 지은 겁니다. 하느님을 옴짝달싹 못하게 가둬버렸어요. 즉 기득권을 공고히 하게 된 구실을 합니다. 다윗 왕실과, 이스라엘 신앙의 사제들 원로들이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권력은 격차와 차별에서 오는데, 성전을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그리고 율법을 해석하는 이들 사두가이파, 사제계급들, 왕과 귀족들, 백성의 지도층이 중심이 되어, 율법을 해석하고, 성전중심주의가 됩니다. 여기에서 성직중심주의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걸 온 몸으로 깨부숩니다. “성전을 허물어라!” 당신 스스로가 성전이 됩니다.

 

예수님처럼 세상 속에서 복음을 선포해야

둘이나 셋이 모인 모든 곳에서도 기도하여 온 세상에서 성전이 되게 하면서,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걸 잘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사명이 아니라, 성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것을 코로나가 알려준 겁니다. 그동안 우리 신앙이 성전중심주의, 성직중심주의였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에서 우리는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깨부순 것처럼, 우리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살이를 바라보고, 세상 안에서 우리의 사명,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은 성당 안이 아니라 세상 속입니다.

 

세상이라는 성전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하나

당에서 이뤄지는 전례에서 벗어나서,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 일상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전례는 직무사제 중심이죠. 성당과 전례와 직무사제, 그리고 신자분들은 보편사제직. 여기에 집중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예언직, 왕직, 사제직. 예언자로서, 사제로서, 사목자로서 세상이라는 여러분의 성전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직무사제가 성당에서 올리는 것이 첫 번째 미사라면, 여러분이 발 딛고 있는 모든 곳이 다 성전이며, 그곳에서 예언자이며 사목자로서 여러분이 봉헌하는 미사가 두 번째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빵과 포도주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양식이 되고 음료가 되고, 여러분 중에 가장 작은 이들, 형제들에게 빵과 음료가 되는 겁니다. 

 

 

사제이며 동시에 제물이 되는 보편사제

이걸 거행하는 것, 그 주체가 여러분입니다. 사제이며 동시에 제물이 됩니다. 성당에서 전례를 통해 직무사제가 올리는 첫 번째 성체성사이며, 여러분은 세상이라는 성전에서 여러분이 사제이며 제물로서 여러분을 봉헌하는 겁니다.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에게로, 즉 첫 번째 미사가 끝나고 세상으로 파견을 나갑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이라는 것 “밀떡이 예수님의 몸이란 걸 믿습니까?”는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빵과 음료가 될 것인지를 묻는 겁니다. “아멘”이란 답변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도 세상이란 성전에서 제가 스스로 제물이 되어 양식과 음료가 되어 저도 그렇게 기억하여 행하겠습니다.”라는 게 “아멘”의 의미입니다. 

 

시노달리타스의 진정한 의미

그런데 우리가 두 번째 미사에 너무 소홀했습니다. 왜 할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사제이며, 예언자이며 사목자이므로, 중요한 영역인 세상을 너무 소홀히 하면서 신자들이 바보가 되었습니다. 성당 안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허드렛일’말고 뭘 합니까? 제대 위에서 직무 사제가 다 합니다. 수녀님들 역시 신부를 돕습니다. 그리고 ‘외부인 출입금지, 관계자 외 출입금지’ 여러분은 뭐합니까? 그러면서 ‘시노달리타스’라고 말합니다. 밥 먹으러 갈 때 같이 가는 거 말고, 본당 안에서 전례 중심의 삶에서 미사를 보는 거 말고 뭐가 있습니까? ‘시노달리타스’라 이뤄지려면 세상을 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할 게 너무 많습니다. 성당 울타리 안에서는 ‘시노달리타스’를 백날 얘기해봐야 공허합니다. 세상을 함께 언급하면서 사목적 파트너가 됩니다. 성당 안에서의 역할분담을 이야기해도 교회법적으로 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건 세상입니다. 

 

이미 세상 끝에 가 있는 보편사제들

신부들은 세상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우린 교회 안에서만 전문가이고, 여러분은 세상 끝에 가 있습니다. 세상 끝이란 어떤 곳일까요? 어떤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은 휴게소 하나 없어서 화장실에서 밥을 먹습니다. 그곳이 세상 끝입니다. 직무사제들은 갈 수 없어도, 신자들은 그곳에 이미 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분들이 성당에 와서 사명을 일깨우고 다시 세상 끝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겁니다. 타볼산이 성당 같은 곳입니다. 용기를 주는 곳,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현장으로 다시 내려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십자가가 있는 곳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만듭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힘드니 여기 오세요. 방공호처럼 성당을 알립니다. 밖에는 시끄러우니, 여기 가만히 계세요.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여기 오세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야전병원이 성당입니다. 복음선포하고 상처받으면 다시 성당에 와서 치유받는 것, 타볼산 같은 곳, 그리고 다시 산 밑으로 세상으로 내보냅니다. 그런데 교회는 지금 거꾸로 돌아갑니다. 노아의 방주같은 역할, 지하 방공호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타볼산 같은 곳으로, 야전병원같은 곳으로, 그래야 시노달리타스가 가능해집니다. 성당만 가지고 그런 얘기해봐야 달라질 게 없습니다. 순전히 성당 안에서만 뭔가 특별히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세상을 빼놓고 이야기하면 할 게 없는 겁니다. 

 

교회와 세상이 함께 해야 시노달리타스가 가능

교회와 세상이라는 2개가 함께 가야 시노달리타스가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사제이며 사목자, 이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당살이가 아니라 세상살이로, 전례 뿐만 아니라, 일상까지, 직무사제, 그리고 보편사제. 첫 번째 미사에서 두 번째 미사로 확장하는 겁니다. 구분하고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전례 안에서 세상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겁니다. 따라서 믿을 교리에서 사회교리로. 성당 안에서 직무사제가 맨날 믿을 교리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을교리가 구체화되는 것이 바로 사회교리입니다. 

 

믿을 교리는 후레쉬와 같은 것 

믿을 교리는 후레쉬입니다. 그런데 후레쉬를 켜서 눈에 대면 그게 보이나요? 그것으로 세상을 비추는 것입니다. 세상을 비춰야 세상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후레쉬 불빛을 눈에 갖다댑니다. 그리고 무조건 “믿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받아들이세요.”하면 그냥 또 넘어갑니다. 그런 건 머릿속에만 있습니다.  후레쉬로 세상을 비춰야 하느님이 어디 계신가 보입니다. 말구유로 오신 예수님, 이 시대 마굿간은 어디인지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 우리의 복음적 감수성을 코로나가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 생태적 감수성

둘째, 보편성(연결성, 형제애),

셋째, 선교적 감수성(그리스도인의 사명)

 

이 세가지 감수성을 코로나가 일깨워주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소명을 코로나가 알려줍니다. 하늘은 세상이고, 우리가 연입니다. 그런데 연은 연줄로 이뤄져 손에 잡혀 있습니다. 바로 이 손이 교회이고 본당살이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미사이고 직무사제의 역할입니다. 여러분이라는 연은 보편사제직으로 세상살이로 사제직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줄이 늘어져있어도 손으로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줄이 아니라 연을 손이 쥐고 있던 셈입니다. 반면 연의 줄이 끊어진다면 또 어떻습니까? 꼭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과 사회교리는 반드시 믿을교리, 본당, 전례, 직무사제와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을 되찾아나가야 합니다. 

 

김소월의 시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約束)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사회교리학교(제37기) 토크콘서트 종료

2023년 12월 9일(토) 오후 4시 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