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 문제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홈페이지
‘사이버 역시관’에서 인용
www.womenandwar.net


일본군 '위안부 문제'란


1930년대부터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제도적으로 ‘군위안소’를 설립하여 점령지와 식민지 여성들을 동원하여 성노예로 만든 범죄를 일컫는다. 


일본군‘위안부’란 용어에 대하여


그 당시 일본군 문서에서‘위안부’라고 부르고 있었고, 1993년 제2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아시아의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들이 토론한 결과 범죄의 주체인 일본군을 명기하고 역사적인 용어로서의 위안부를 따옴표 안에 넣어 일본군‘위안부’로 표기하기로 하였다. 영어로는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으로 표현하여‘성노예’라는 범죄의 본질을 드러낸다. 

  • 종군위안부 : 1990년대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나 ‘종군’이라는 단어에는 자발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 정신대 :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의미로 일본의 전시체제 돌입과 함께 조선의 노동력을 강제동원한 제도로 여성의 경우 여자(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정신대 이름으로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명목으로 여성들을 끌고 갔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초기에는 정신대로 알려져 있었다. 

제 동원


1932년 초 상해사변 때 일본군인들에 의한 강간사건이 빈번해지자 점령지역에서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었고 군인들이 성병이 감염되는 일이 발생하여 전쟁수행에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위안소’제도가 도입되고 식민지 및 침략지 여성들의 동원이 시작되었다. 한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들의 실태조사를 통해 확인된 바로는 연행 당시의 나이가 11세에서 27세에 이르며 대다수 취업사기나 유괴, 납치 등의 방식으로 동원되었다. 


‘위안소’의 규정과 ‘위안부‘들의 생활 


‘군위안소’는 설립, 운영,‘위안부’모집에 있어 군이 직접 하거나 민간에 위임한 경우 그밖에 시기와 장소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나타냈으나 어느 경우에나 군대의 보호와 감독,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각‘위안소’의 규정에는 계급별 사용시간, 요금, 성병검진 및 기타 위생사항 등이 명기되어 있었으며, 많은 군인들이 몰려 20-30명이 문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일본군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위안부’들은 일본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 성병검진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했으며, 월경, 임신, 질병에 걸리더라도 무자비하게 강간을 당했다고 증언한다. 여성들은 마음대로 ‘위안소’를 떠날 수 없었고 기본적인 이동이나 생활도 통제를 받아야 했다. ‘위안부’들을 일컬어 “천황이 하사한 선물”, “위생적인 공중변소”라고 하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1945년 종전시 ‘위안부’들의 상황


일본의 패전과 함께 일본군‘위안부’들은 현지에 버려지거나 폭격으로 사망, 혹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생존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고난에 직면해야 했고, 일부는 차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어 귀국을 포기하기도 했다. 


해방 후 생존자들의 생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위안소’에서 당한 구타나 고문 그리고 성폭력 등으로 인해 평생 치유하기 힘든 신체적 고통 속에 살아야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고 이로 인해 가정을 이루는 것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여러 심리적 후유증을 평생 안고, 주위의 시선과 편견에 맞닥뜨려 긴 세월을 침묵 속에 살아야만 했다.


침묵을 깨트린 용기 


1988년 ‘여성과 관광문화 세미나’에서 윤정옥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드러난 후 많은 여성단체들과 더불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결성(1990년 11월 16일)되어 일본정부를 향해 문제제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관여 사실을 부인했다. 

이에 故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14일 최초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바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이는 다른 피해자들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용기를 주었고 문제해결을 향한 걸음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웃, 가족과도 단절된 채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조차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없었던 생존자들은 많은 여성들, 시민들과 손잡으면서 적극적으로 일본정부의 범죄행위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출처. 한일 일본군‘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천주교전국행동 발행(2016.12.2)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강론 및 교육 자료집 민족의 십자가, 우리의 어머니』25~26쪽




Posted by 대전정평위뉴스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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