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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김용태 신부 강론] 우리의 기도는 칠흑같은 어둠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될 것입니다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1. 3. 30.

우리의 기도는  칠흑 같은 어둠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될 것

 

2021년 3월 29일(월) 저녁 7시 미사, 김용태 마태오 신부 강론 전문

성주간 월요일 "미얀마의 평화를 위한 기원미사" (이사 42,1-7/ 요한 12,1-11)

 

김 용 태 (마 태 오)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장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며 그 고통의 신비에 동참하기 위해 기도하는 성주간 월요일, 우리는 미얀마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죽임을 당하는 미얀마의 부활을 위해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하느님 대전에 모여와 간절한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2021년의 미얀마 그리고 1980년 대한민국의 광주, 어찌 이리도 닮았습니까! 저 군부쿠데타 세력의 잔악한 폭력이 서로 너무 닮았고, 그 폭력 앞에 무참히 짓밟히는 시민들의 참상이 서로 너무 닮았고, 그 모습을 보고도 어찌 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의 그 무기력함이 서로 너무 닮았습니다.


그 중에서 무기력함은 지금 2021년의 대한민국이 2021년의 미얀마를 바라보며 가질 수밖에 없는 가장 대표적인 심정은 아닐까요? 과거와는 달라서 인터넷과 SNS를 통해 미얀마의 참상을 전해 받을 수 있고 또 그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지만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참담함이 가슴을 짓누릅니다.

 

미얀마 국기 앞에서 슬퍼하는 미얀마의 자매님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의 제자들의 심정도 그랬던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먹은 유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다른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그동안은 그들의 부족함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지금 미얀마의 고통 앞에서 제 스스로가 무기력함을 느끼면서 과거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자신의 무기력함 앞에 얼마나 참담해 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우리는 강도 만나 죽어가는 미얀마 사람들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해줄 수가 없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가던 길 멈춰 서서 응급처치를 해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함께 있으면서 돌봐주고 그것도 모자라 여관 주인에게 비용까지 대면서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지속적인 치료를 부탁하고 떠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저 인터넷에 올라오는 영상과 사진을 보며 분노하고 그 영상과 사진들을 SNS를 통해 퍼 나르며 그 외에는 어찌하지 못하는 답답함 속에서 그저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이 무기력함은 7년 전 이맘때 수백 명의 고귀한 생명이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그냥 무기력하게 지켜봐야했던 기억과 겹쳐져 오늘 더욱 큰 참담함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참담함 속에서, 그 부서지고 꺾인 마음으로 오늘 우리는 다시 성주간을 지내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으로 다시 묻습니다. 주님 어찌 해야 합니까? 미얀마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당신께 제가 무엇을 해드릴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어떤 명쾌한 설명도 없이 묵묵히 당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의 모습만 보일뿐입니다.

 

미얀마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쳤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무기력하고 그 옆에서 함께 걸어가는 이들도 그저 무기력합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라더니 당신 신세가 지금 영락없는 부러진 갈대요 꺼져 가는 심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길에 동행하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저 슬픔 속에서 탄식하며 걸어가는 게 전부입니다. 그중에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얼굴을 씻어주거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에서 구해주지는 못합니다. 무기력한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따르는 무기력한 사람들의 십자가의 길! 그렇다면 주님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드리는 이 질문 앞에서 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도중에 유일하게 하셨던 말씀, 그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던 여자들에게 예수님은 돌아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 주님의 십자가와 미얀마의 십자가 앞에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 마음, 그 고통에 대한 연민과 슬픔,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들에 대한 분노와 뉘우침, 그리고 그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끝까지 동행했던 정성, 이 모든 것을 미얀마의 형제들에게, 세상의 모든 형제들에게도 똑같이 행하라는 명령이 아닐까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아파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답답해하는 그 마음만이라도 갖는 것, 직접 가서 도와줄 수는 없어도 형제들의 아픔과 진실을 주위에 알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어떻게 도와줄지 궁리하고 모색하는 이 작은 정성만이라도 봉헌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형제들이 부활을 향해  가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게 만들어주는 그 힘이 아닐까요?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독일 기자가 생각납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군부쿠데타 세력에 의해 언론이 모조리 장악된 상황에서 80년 광주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신 분입니다. 영화 <택시 운전사>라는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이분의 행동이 광주 학살을 멈추게 만든 것도 아니고 군부세력을 몰아낸 것도 아니지만 세상이 우리의 참상을 알아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무섭고 숨 막히던 그 시절의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커다란 위로요 힘이었습니다.


우리가 미얀마에 갈 수도 없고 미얀마의 부상자들을 치료해줄 수도 없고 미얀마의 군부를 몰아낼 수도 없지만 미얀마를 생각하며 갖는 우리의 마음, 미얀마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기도는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사흘,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기도는 힘과 위안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관심과 기도, 정성과 노력은 우리 자신에게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향기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3) 향유가 부어진 곳은 예수님의 발이지만 향기는 예수님의 발만이 아니라 온 집 안에 가득합니다. 그렇게 사랑은 향기처럼 번져갑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미얀마의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며 봉헌하는 작은 정성과 노력도 향기처럼 번져 미얀마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도 또 다른 힘과 위안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마음과 다짐 오늘 주님께 봉헌하면서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기념하는 거룩한 성주간 월요일의 이 미사를 다 함께 봉헌합시다.

 

마시를 마치며 미얀마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