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약속했던 부활은 목숨을 바쳤을 때의 부활입니다

 

2021년 5월 29일(토) 오전 정평위 파견 미사, 김용태 마태오 신부 강론 전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에 부쳐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장

 

 

대전 유성구 갑동 꼰솔라따 수도원 회의실의 십자가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축일입니다. 
최근에 어떤 신부님이 교황청에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교황청의 잘못된 판단으로 조선에 박해가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일 때문입니다.  그 순교자 분들이 바로 윤지충 바오로와 진산사건 등인데요. 그것은 제사문제로 또 어머니 신주를 불태우고, 그러면서 빚어진 일입니다. 교황청에서 제사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잘 얘기해줬어야지. 그렇지 않고 그냥 "안된다"라고 해버렸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비극이 빚어졌다는 취지인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그걸 보면서 든 느낌은 "이건 아닌 것 같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교황청의 판단이 잘못되었지요. 제사라는 게 뭔지 모르고, 지금이야 제사를 당연히 허용하고 있지만, 그 당시 아시아의 제사에 대해 모르고 있어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인데요. 그것을 지금 와서 사과하라고 하는 것은 "순교자들을 희생자로 보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용태 마태오 신부 (2021-5-29 오전)


우리는 순교자를 희생자로 보지 않습니다. 신앙을 가진 천주교인들 중에 순교자들을 떠올리면서, "아휴 불쌍하다. 애처롭다. 비극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순교자들을 떠올리게 되면 내 마음 속에 존경심이 생기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반성 등등 그렇게 우리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순교자를 떠올리면서 그 분들을 희생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순교자들을 희생자로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신앙적인 면에서 그러한 처사에 찬성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비록 순교자들이 희생당했지만, 그 분들 스스로가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순교자입니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있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모습은

적극적인 죽음 


복음을 통해서 보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이 모습, 이건 자기가 적극적으로 죽는 겁니다. 적극적인 죽음이 있고, 이걸 "목숨을 바친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있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이게 뭐냐면, 죽고 싶지 않지만, 정말 죽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죠. 자살하는 사람들도 그런 것에 포함될 겁니다. 자살이란 죽고 싶어서 죽은 게 아니라 죽임을 당한 거죠. 왜냐하면 더 이상 살 수 없기에, 마지막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라서, 사회적 타살이라 표현하듯이, 자살도 어찌보면,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강조하시면서 초대하는 죽음이란 목숨을 잃는 게 아니라,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부활도 목숨을 잃었을 때가 아니라, 목숨을 바쳤을 때의 부활입니다. 목숨을 바쳤을 때, 그때 부활이 이뤄집니다. 이건 자기 스스로의 부활 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부활을 위해서도, 내가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 때 그가 부활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라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김용태 신부가 파견미사를 봉헌하고 있다(2021-5-29 오전)


이 시대에 수많은 죽음과 수많은 희생들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희생하려는 사람이 없기때문에 그렇게 희생자들이 많은 게 아닐까요. 이 시대의 수많은 희생들이 있지만, 그게 적극적으로 희생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희생당하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고, 목숨을 잃어버리는 사람만 있기 때문에, 순교자들이 많은 게 아니고, 희생자들이 많은 겁니다. 

우리 교회가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많은 희생자들이 있기 때문에 부활을 꿈꾸지만, 정작 그 부활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내가 기꺼이 희생하는,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죽음이 있어서, 부활이 오는 건데요. 그 부분은 빼버리고, 그냥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니까, 부활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심정만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먼저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이 있은 다음에 부활이 있는 건데, 그 죽음은 없고, 부활만 이야기하니까, 희생하려고 들지 않으니까 희생자만 늘어나는 이런 모습들 ... 

이런 모습을 우리가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이 교회가 처한 모습이 아닌가. 오늘 복음에서도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이 복음적, 성서적 표현에서 "미워한다"라는 것은 "나보다 자기 형제를 더 사랑하는 사람"인데, 이걸 "자기 부모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이란 식으로 예수님이 표현합니다. "미워한다"라는 건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교급 표현으로, "누구보다 더"를 "미워한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건 자기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그 사랑하는 대상보다 더 자기목숨을 미워한다고 표현하는 것이죠. 결국 뒤에 설명이 나오는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 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적극적으로 따르기 때문에 부활이 이뤄지는 것 


여기서 말씀하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죽임 당하는 삶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날 따르기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삶. 그 삶에서 부활이 이뤄지는 것. 바로 이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 부분이 매우 취약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산과 언덕이 깍여서 골짜기가 메워지면, 그렇게 메워진 골짜기 모습이 부활이지만, 산과 언덕에게는 죽음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골짜기가 메워지는 것만 이야기하지, 산과 언덕이 깍여져야 한다는 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걸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구나." 베드로는 산과 언덕이 깍여지는 건 생각하지 않아요. 골짜기가 메꿔지는 것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맙소사 예수님!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예고를 하실 때, 당신이 앞으로 밀알 하나 떨어져 죽듯이, 내가 그렇게 살것이다라고 했는데, 맙소사,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죠.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하면서,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구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일"이란 부활만 이야기하지 죽음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떨어져 죽는, 내가 기꺼이 죽어주는, 산과 언덕이 깍이는, 이런 건 생각하지 않고 골짜기가 메워지는 것에 대한 생각만 하는 것이죠. 

우리들 신앙 안에서 이런 게 만연합니다. 신자분들의 기도 안에서도, 골짜기가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산과 언덕이 깍여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않습니다. 이게 이뤄져야, 먼저 죽음이 이뤄져야, 산과 언덕의 죽음을 통해서 골짜기의 부활이 이뤄지는 건데, 우리가 이걸 놓치고 있기 때문에, 부활이란 말은 넘쳐나는데, 희생자는 줄어들지 않는 모순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겁니다.  

 

 

대전정평위 파견미사 2021-5-29 오전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는 순교자의 삶이란 깍여지는 산과 언덕의 삶을 실천한 분들입니다. 직접 자신들이 밀알이 되어 죽음을 바쳐서 죽은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 부활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것은 자신만의 부활이 아니고, 내 형제의 부활을 위해서도 내 죽음을 기꺼이 선사하는 모습이 서로를 살리는 것은 아닌가. ...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맞은 사람의 부활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죽음에서 비롯됩니다. 가던 길 멈추고, 자기 시간, 자기 돈 할애해 가면서, 기꺼이 강도 맞는 사람을 치유해주는 이 모습이 바로 죽음입니다. 적극적으로 죽어주는 것. 그런데 이런 걸 포기하고 놔버리면, 강도맞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겠죠. 내가 내 형제를 살리는 부활은 내 자신의 그러한 크고 작은 죽음으로부터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맙소사 주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교자들을 늘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미사를 올리며 기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인데요. 그런데 우린 여전히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 그러면 안됩니다." 이러고 있는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만연해 있지 않은가?

좀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이런 말을 가끔 합니다. "우리 교회가 쇄신되려면 박해가 다시 와야 한다." 지금은 죽지 않아도 되는 교회여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부활은 죽음에서 오는 것인데, 죽지 않아도 되는 교회니까, 또 죽으려고 하지 않는 교회니까 희생자만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요. 이게 교회가 가진 모순입니다. 오히려 박해시대는 죽어야만 하는 교회였기때문에 거기에 부활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설과 모순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래서 우리 안에, 이 시대에 박해가 온다면, 그것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삶 안에서, 그런 걸 찾아본다면,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면서 죽으려고 하는 것, 그 어려움 자체가 박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해 버리면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박해는 150년 전, 200년 전에 외부적 자극에 의해서 오는 박해만 있는 게 아니고, 사제나 레위인들은 강도맞은 사람을 돌보지 않고 가버렸잖아요.  박해를 피해서 간 거죠.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거기에 들인 돈과 시간, 그리고 공들인 것들 이런게 사실 박해입니다. 불편하고 힘든 것들이니까요. 그래서 이 시대 우리들의 박해는 외부적 자극이 아니고 내부적 자극인 것이죠. 하기 싫어도, 이게 올바른 것이니까 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좀 쉬고 싶어도 쉬지 않고. 아까워도 숨기지 않고 내어주는 것. 일어나서 그 사람과 함께 있어주는 것. 이런 것들이 스스로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박해이며, 그런 박해를 이겨내면서 거기에서 참된 죽음과 부활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는 앞으로 정평위 활동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먼저 앞서서 살아가신 순교자들 삶의 모범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분들의 삶이야 말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밝혀주신 모습이라 생각하면서 오늘 거룩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복음의 초대 말씀에 충실히 잘 응답하고, 죽임을 당하는 삶이 아니라 기꺼이 내 형제를 위해 죽어주는 밀알로써의 삶을 살도록 다짐하면서 미사를 봉헌했으면 합니다. 

 

 

대전시 유성구 갑동 꼰솔라따 수도원의 모습(2021-5-29. 오전)


오늘(2021-5-29. 토) 복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Posted by 대전정평위뉴스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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