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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김용태 신부 강론 ... 우리가 가진 재물은 가난한 이들의 것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2. 3. 18.

대전 정의평화위원회,  2022년 두 번째 정세미(3/17 목 19:30) 주례강론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김용태 마태오 신부(천주교 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용태 마태오 신부(오른쪽)과 박주환 신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라자로에 대한 강론” 중 일부분이다. 성인의 이 말씀처럼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라자로를 돌보아 주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개인적 차원의 자선이다. 사회적 차원의 자선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법과 제도를 이용해서 부자가 라자로를 돕게 만드는 것이다. 라자로가 마땅히 받아야할 빵을 받지 못하는 부당한 상황을 해결하고 부자증세와 기본소득 그리고 복지제도의 정비를 통해 라자로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바로 사회적 차원의 자선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당위성과는 다르게 드러난다. 부자가 라자로를 돕는 개인적 차원의 자선도 잘 실천되지 않고 법과 제도를 통한 사회적 차원의 자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가난한 라자로 같은 이들이 부자들만을 위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무시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탐욕스런 부자를 지지하는 라자로라니! 이 모습은 우리가 현대사 안에서 지금까지도 선거 때가 되면 늘상 목격하게 되는 자기모순의 황당한 현상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번 3월 9일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러한 자기모순이 드러났다. 가난한 청년과 여성과 노인, 저임금 노동자, 영세 상인, 집 없는 사람들이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차별을 공고히 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한다는 것이 참으로 황당하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복음적 가치 아래서 일을 하다가 이런 경우들을 겪다 보면 참으로 허탈하다. 성주 소성리에 배치 되어 있는 사드를 뽑아버리고 평화로운 세상 만들자며 열심히 미사와 기도를 봉헌하고 있는데 정작 그 지역 사람들이 사드를 배치한 정당의 정치인을 뽑아주는 황당함, 밀양 송전탑 때문에 고통받는 주민들을 위해 송전탑 건설 철회를 위해 연대하고 기도해왔는데 정작 그곳 사람들은 송전탑을 심어놓은 정당을 지지하고 그 정당의 정치인을 뽑아주는 황당함,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연대하면서 미사와 기도를 봉헌해왔는데 정작 세월호 참사 후에 있었던 총선에서 안산 단원고 지역의 국회의원으로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는 정당의 후보자가 당선되는 그 황당함! 라자로가 탐욕스런 부자를 적극 지지하는 이 모순 앞에서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그래, 너희도 한번 당해봐라! 역시 우리 국민들은 개돼지들인가! 하면 뭐 하나 또 저러는데! 그래, 이제 나도 모르겠다. 너희들이 뽑아준 사람들이랑 잘 해봐라!”
마음속에 부아가 치밀고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쳐버린 요나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하면 뭐 해요, 들어 처먹지를 않는데!” 요나의 속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2022년 사순 제2주일에 열린 정세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니네베로 향한다.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나고 고래 배속에 삼켜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오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한다. 가로지르는데 사흘이나 걸리는 거대한 도시를 대충 하룻길만 걸은 다음,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죄 때문에 무너진다고 경고한다. 요나의 말을 귀담아들은 니네베는 회개하고 멸망에서 벗어나지만 요나는 이 일이 그리 달갑지 않다. 따끔하게 본보기를 보여 주시면 좋으련만 주님께서 니네베를 살려주시니 저것들이 주님을 만만히 보고 언젠가는 또다시 등을 돌려 죄를 지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개돼지같은 저들에게 또 속으시는 주님이라고 요나는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요나에게 그리고 옳은 일을 하다가 실의에 빠진 모든 이에게 주님은 당신의 마음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신다. 그 마음은 다름 아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당신의 사랑이다. 주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하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은 법과 제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자비로운 하느님께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결국 부자와 라자로의 처지가 뒤바뀐다는 사실이다. 이 모습은 가난한 사람은 다 천당 가고 부자들은 다 지옥 간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결국에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신다는 의미이다. 오늘 1독서의 말씀과도 같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그렇게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당장에는 속상하고 황당하고 답답하고 막막해도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바로 잡아 주시는 하느님께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여정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