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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김용태 신부 강론 - 사랑이 '갑'이다

by 편집장 슈렉요한 2022. 2. 18.

사랑이 '갑'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 김용태 신부 강론 전문

2년만에 다시 시작하는 정세미 (연중 제6주간 목요일 2022-2- 17일 목)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장


‘갑질’,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부당한 위력을 행사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등장한지 몇 년 되지 않은 인터넷 신조어지만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용어가 되어 버렸다. 그만큼 많이 쓰인다는 얘기이고 그만큼 이 땅에 ‘갑질’이 만연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사실 ‘갑질’이란 것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겠는가! ‘나보다 힘이 없는 이에게 가하는 폭력’이란 것은 인류의 역사 안에 불평등과 차별이 자리하기 시작하면서 늘 존재했을 것이다.

 

세종 성요한 바오로2세 성당의 성전에서 김용태 신부가 강론중이다. 


그런데 ‘갑질’이란, 말 그대로, ‘갑’이 ‘을’에게 행사하는 폭력이다. 다시 말해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힘 있는 이가 힘없는 이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그러다 보니 ‘갑질’이란 것은 ‘내리폭력’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위에서 아래로 거기서 다시 더 아래로 가해지는 폭력인 것이다. 힘센 누군가에게 ‘갑질’을 당한 이가 자기보다 약한 누군가에게 ‘갑질’을 가할 수 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식이다. 우리 모두는 ‘갑질’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이 시대의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더 힘없고 더 가난한 이들을 향해 가해진다. 그야말로 권력을 지닌 고관대작들만이 아니라 대감집 머슴이 동네 거지에게도 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갑질’인 거다.

 

세종 성요한 바오로2세 성당의 성전(3층) 


한편, ‘갑질’에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하기도 한다. 내가 당한 ‘갑질’을 나보다 더 약한 이들에게 가하는 또 다른 ‘갑질’로 보상받는 것이다. “이젠 내 차례야!”라는 식으로 지금까지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나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원청업체에게 당한 손실을 재하청으로 메꾸려 하거나, ‘쫄병’ 때 당한 그 짓을 ‘고참’이 돼서 똑같이 저지르고, 며느리 때 당한 시집살이를 시어머니가 돼서 똑같이 시킨다. 학생운동에 열심이던 사람이 나중에 고위 공직자가 되어 전에 자신이 욕하던 그 모습과 똑같아지는 것은 ‘변절’이라기보다는 ‘갑질’이라는 욕망에 충실한 모습일 뿐이다.


이렇게 ‘나보다 더 작은이’에게 가해지는 ‘내리폭력’과 ‘보상심리’로서의 ‘갑질’은 폭력의 고리가 되어 악순환하고 대물림된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보도되는 몇몇 사회 고위층 인사들의 ‘갑질’에 분노하지만, 사실 ‘갑질’이란 것은 오랜 세월 인간의 욕망 안에 깊이 뿌리내려 이어져 내려오면서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불평등과 차별과 거기에서 나오는 폭력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얻기 위하여 우선 먼저 우리는 모든 폭력의 원인이 되는 우리 안의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안에서 불평등과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것을 싫어하기 보다는 오히려 원하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차별받지 않기를 원한다. 마땅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원하는가? 가만 보면 그건 또 아니다. 사람들은 차별받는 것은 싫어 하지만 차별적으로 더 나은 대접을 받는 것은 좋아한다. ‘갑질’ 당하는 것은 싫지만 ‘갑’으로 대우 받는 것은 좋아한다. 이러한 이율배반적 욕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온갖 불평등과 차별에 저항하기 보다는 자기보다 더 힘없는 ‘을’을 찾는 일에 더 열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결국 세상의 온갖 불평등과 차별을 용인하고 거기서 오는 폭력에 침묵하고 동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이율배반적인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에 만연한 불평등과 차별을 극복하고 거기에서 오는 폭력의 악순환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한 그 해답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관계들이 대부분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단 하나 그 어떤 차별과 불평등도 그 어떤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 유일한 관계가 바로 사랑의 관계다. 사랑을 하게 되면 서로 같아지길 원한다. 높이 있는 것은 내려와 같아지려 하고, 많이 가진 것은 나누어 같아지려 하고, 앞서 있는 것은 기다려 같아지려는 모습을 지닌다. 사랑에는 ‘갑질’이 있을 수 없다. 산과 언덕이 깎여서 골짜기를 메워주어 평지가 되고 평야가 되게 하는 그 힘은 사랑이다.(이사 40,4 참조) 따라서 차별과 불평등에서 비롯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사랑의 구조로 탈바꿈해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당신과 같아지게 하시려고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필리 2,6-7)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그렇게 당신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 가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나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6.28)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 닮은 사랑으로 초대하시면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모든 관계를 갑과 을이 아닌 가족의 관계(마태 12,50 참조)로, 주인과 종이 아닌 친구의 관계(요한 15,15 참조)로 이끄신다. 우리는 주님의 이 초대에 성실히 응답하여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에게 잘해주는 이들에게만 잘해주는 좁아터진 사랑에서 벗어나 세상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드넓은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루카 6,27-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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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사랑하면 알리라. 높은 데서 홀로 굽어보는 그 짜릿함보다 낮은 곳에서 다 함께 어울려 사는 그 담박함이 더 낫다는 것을! 혼자서 누리는 특별함보다 다 함께 나누는 평범함이 더 낫다는 사실을! 사랑이 ‘갑’이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도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같은 예언자들을 떠올리거나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떠올린다면 참 좋겠다. 그런 게 바로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다.  

 

김용태 마태오 신부(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